전장의 심장을 잇다
제 이름은 엘레나 마이어스(Elena Myers)입니다. 저는 미국 국적의 전쟁사 전문 역사학자이자, 국제 전시기록 보존연구소 소속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전쟁 속 인류애와 희생의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며 살아왔습니다. 제 연구는 수많은 전쟁 영웅의 묻힌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진심으로 마음을 빼앗긴 전쟁 이야기는 단 하나, 바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의 ‘강류 부대’ 이야기였습니다. 처음 그들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가슴 깊이 뜨거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조국의 명령 하나에 모든 것을 바쳐, 머나먼 타국 한국을 위해 싸우고, 죽고, 그 누구보다 성실히 임무를 완수했던 전사들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잊혀진 그들의 이야기, 하지만 그 희생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됩니다. 저는 큐레이터로서의 사명감 이상으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 다시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를 한국인 여러분께 직접 들려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생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검은 전사들이 지킨 한반도
1951년,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명령으로 조직된 ‘강류 부대’는 100% 자원병으로 구성된 특수 보병부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침략했던 이탈리아에 대한 분노와 아픔을 가슴에 안은 채, “고통받는 타인을 외면하지 말라”는 황제의 신념을 따라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이국적인 피부색, 고산지대 출신의 강인한 체력, 그리고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던 그들의 전투력은 곧 전설이 되었습니다. 253번 전투에서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전승, 심지어 단 한 명의 포로도 발생하지 않았던 그들은 유엔군 내에서도 ‘가장 용맹한 부대’로 기억됩니다. 철원, 화천, 적근산, 삼각지 등 한국의 추운 전장에서 아프리카 병사들이 영하의 날씨 속에 전투를 치렀다는 사실은 지금 들어도 기적입니다. 그들은 총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남기고도 단 한 번의 후퇴 없이 전장을 지켜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전원 본국으로 송환되었기에, 유엔군 묘지에 에티오피아 병사의 묘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많은 이들이 모르는 사실입니다. 이 작고 아름다운 예우는, 그들의 싸움이 얼마나 진지하고 진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국경을 넘어선 형제애의 기록
강류 부대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결국 그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강원도 철원과 동두천의 보화원을 방문하였습니다. 1953년, 그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아 고아들을 돌보며 세운 보육원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었고, 거기엔 아직도 그들에 대한 감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고, 수교 이후 에티오피아와의 외교적 관계를 굳건히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영웅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뒤, 쿠데타로 인해 그들은 오히려 반역자로 몰렸고, 핍박과 가난 속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그 어떤 증오의 말 없이 그들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워 행복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저는 다시금 묻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는가요?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에티오피아의 강류 부대가 싸운 곳입니다. 그들이 흘린 피는 이 땅에 스며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피의 대가로 얻은 자유를 헛되이 하지 않아야 하며, 국경을 넘어 도운 형제의 이름을 가슴에 품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단순히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진실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 가르침을 전하며, 또다시 강류의 심장을 가진 그들을 기억합니다.